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네모로직 책을 꺼냈습니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두께이지만 앞부분만 한 흔적이 있고 뒤에는 아주 깨끗했어요. 네모로직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고3 수능이 끝나고 나서입니다. 수능이 끝나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할 일이 갑자기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학교에 가면 틀어주는 영화를 보거나, 자거나,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했어요. 그렇게 무료하게 보내던 어느 날 학교에 친구가 네모로직을 가져왔어요. 재밌어 보여서 옆에서 얼쩡거렸더니 친구가 네모로직 페이지를 한 장 찢어주었습니다. 친구가 준 종이를 받아 들고 바로 제 자리에 와서 하기 시작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재밌다고 느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시간 때우기에도 얼마나 좋은지 네모로직을 하다 보면 금방 하교 시간이 되는 것 같았어요. 결국 저는 서점에서 네모로직 책을 샀어요. 오랜만에 꺼내든 책은 그때 샀던 책이에요.
수능이 끝나고 한창 하다가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가, 또다시 생각나고 잊혀지기를 반복하며 네모로직 책을 채워갔어요. 생각해 보니 작년엔 한 번도 한 적이 없네요.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던 네모로직이었지만 재미 외의 면에서 의외로 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모로직을 하고 있을 땐 생각이 없어져요. 물론 네모로직의 어느 칸을 제외하고 어느 칸을 색칠해야 하는지는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 그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걱정을 비롯한 잡생각이 지나치게 많이 떠오를 때 네모로직을 펼치곤 했어요. 참 신기해요. 감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 정신을 집중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볼 땐 잘되지 않더니 네모로직만 시작했다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차원의 세계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네모로직을 하고 나면 기분이 정말 괜찮아져 있거든요. 이번 그림을 다 채우고 나서의 뿌듯함과 성취감이 다른 기분을 압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또 네모들에 집중함으로써 일단 감정적인 상태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감정적일 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면서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곱씹으며 그 감정에 매몰되어 버리는데 네모로직을 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없으니 느끼고 있던 감정이 옅어지는 것 같아요.
네모로직을 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색칠하면 안 되는 칸에 하는 표시, 색칠하는 방법, 색칠하는 도구도 다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저는 색칠하면 안 되는 칸에는 네모칸에 꽉 차게 / 표시를 해요. 예전에는 X 표시를 하곤 했는데 작대기를 하나 더 그리는 게 은근 귀찮기도 하고 깔끔하지 않아 보여서요. 도구는 연필을 사용해요. 예전에는 예쁘게 하고 싶어서 색연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색연필은 지우개로 잘 안 지워지더라고요. 연필도 진한 연필 말고 연한 연필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빗금을 쳐 색칠하기도 하던데 저는 네모칸이 꽉 차게 색칠해요. 처음의 하얀 부분이 보이지 않게 칠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진하고 꼼꼼하게 칠하지는 않아요. 손에 힘을 잔뜩 주고 까맣고 꼼꼼하게 칠했던 적도 있는데 그러면 손날 부분에 연필이 묻어서 종이에 번졌어요. 그래서 번지지 않고, 손에 묻지 않을 정도로 연하게 색칠해요. 네모칸에서 조금 삐져나오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바로 지우개를 들곤 했는데 요즘엔 너그러워졌는지 조금 삐져나오는 것들은 그냥 넘어갑니다.
가끔은 핸드폰 어플을 설치해 네모로직을 해보기도 했는데 역시 손으로 하는 네모로직이 재밌습니다. 색칠하는 감각과 소리를 느낄 수 있어서요. 어제는 예능 프로그램 <노는 언니>를 라디오 삼아 틀어 놓고 네모로직을 했어요. 세 개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나비인 줄 알았던 팬지 꽃과 거품이 흘러넘칠 것 같은 맥주잔, 와이파이 로고를 칠했어요. 오늘도 또 하려고요. 생각이 많을 땐 네모로직을 한 번 해보세요. 꽤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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