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레라비언들. 차차입니다. 8기부터 함께 글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새 9기가 되었어요. 요즘 레라에 들어가면 처음 보는 닉네임이 부쩍 많아졌는데 볼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가득 차오릅니다. 레라에 들어오기 전 저는 한참 눈물과 함께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픈 일이 저를 무너지게 만들었어요. 괜찮다가도 다시 안 괜찮아지는 무한루프에 빠져서는 순간 순간의 감정의 파도에 가만히 몸을 맡겼어요. 제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달라지는 상황은 아니었거든요.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고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괜찮아진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두었고, 괜찮아졌다고 느끼면 또 그대로 두었어요.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완전히 괜찮진 않지만 그런대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요즘엔 격동의 시기 이전의 일상과 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낼 때도 있거든요. 생각이 한 쪽으로 매몰되어 있지 않으니 확실히 더 괜찮아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었단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상담도 해보았습니다. 지금의 제 상태는 당연한 거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나아졌어요. 처음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레라에 들어온 초반엔 정신이 없었습니다. 글쓰기를 그 주의 주말까지 미루고 미루던 이유도, 결국 1주차에 빵꾸를 하나 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즈라이트에서 함께 하게 되어 기쁜 마음과 당장 뒷걸음질 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한데 섞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힘을 내서 글 2개를 올리고 나머지 하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펑크 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머무르던 차단과 단절의 세계에서 나온 이야기를 썼는데, 댓글에 레라비언들의 따뜻함이 잔뜩 묻어 있어서 그 순간 만큼은 힘든 상황도 다 잊어버리고 잠시 녹아 흘렀던 것 같아요. 몽글몽글한 기분을 느꼈답니다. 입에선 웃음이 새어 나오고 댓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또 웃고. 사실 댓글에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망설이다가 달지 못했어요. 사실은 저 낯가림대마왕이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누가 먼저 말을 걸어줘야지만 대답을 합니다. 그것도 고장난 안드로이드 같이 삐걱대는 대답이지만요. 가끔은 대답도 못할 때가 있어요. 멋쩍은 웃음을 대답으로 대신하고 다시 나한테 말 걸지 않아주기를 바라는거지요. 그런데 레즈라이트에서는 아니었어요. 대답하지 못하겠는 건 여전한데 나한테 말을 많이 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 이 아니라 아주 많이 민망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요.
처음엔 댓글도 잘 달지 못했어요. 레라비언들의 글을 읽고 와 좋다, 싶었는데 그 좋은 걸 어떻게 좋다고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그래서 댓글을 쓰다가 지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여전히 낯을 가리는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너무 짧은 댓글도, ㅋㅋㅋㅋㅋ이 들어간 댓글도 달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이요. 너무 짧은 댓글은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고, ㅋㅋㅋㅋㅋ이 포함된 댓글은 왠지 친한척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달 수 없었어요. 글을 올릴 때도 잔뜩 긴장한 채로 입력 버튼을 눌렀습니다. 음, 생각해보면 레라비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봐요. 전 늘 안 그런 척 하면서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어해요. 특히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더요. 입 밖에 내뱉는 말은 어떻게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겠어,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이지만, 정작 그런 상황이 닥치면 상처를 받을 걸 알아서 방어기제가 저도 알아채지 못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모두에게 잘 보이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요. 그래서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고, 누군가를 특별히 더 좋아한다는 마음도 잘 가지지 않았어요. 바싹 메마른 얼굴을 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요. 아 그렇지만 정말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지 않아요. 가끔 쎄이더가 작동할 때 있잖아요. 그럴 땐 낯도 안 가리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이제는 낯 안가려요. 댓글 달 때 맞춤법 검사기로 검사하지 않고, 키읔이 들어가는 댓글도, 좀 짧은 댓글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올릴 때도 긴장보다는 오늘도 글을 써냈구나, 하는 생각과 후련함으로 버튼을 누르고 있습니다. 나오 님의 정산비언 급구 요청해 응답해 함께 스티커판 정산을 하고 있고, 레라 소모임인 매생이클럽과 레즈스톡에도 들어가 있어요. 낯가림이 덜어지니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럴때면 스스로가 참 낯설기도 합니다. 어딘가 모나지 않게 스스로를 깎아내고 가만히 웅크려 있다가 이제 막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아요. 제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불꽃 같았던 마음이 이제는 레즈라이트에서 얻은 따뜻함, 다정함, 그리고 사랑을 장작삼아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면 예언되는 아포칼립스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미래를 내 마음대로 그리지도 못한 채 그저 순서에 따라 받아들여야 했겠죠. 때로는 자라나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흔들리는 동공을 보이겠지만 나를 죽이는 것들을 죽이며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갈거에요. 그 여정엔 여자들의 사랑이 가득할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요. 레라비언들 사랑해요!
2021.01.24.
사랑을 담아
낯가림대마왕 씀
*초 님이 만드신 TRPG 「QUILL : LESWRIGHT」를 플레이하며 쓴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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