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나오면

[381] 2021. 1. 10. 23:54
728x90

안녕하세요. 8기부터 레즈라이트에서 함께 글을 쓰게 된 차차입니다. 레즈라이트에서의 첫 번째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벌써 주말이 되었네요. 첫 글로 제가 레즈라이트에 오게 된 과정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이 싫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았어요. 친구를 사귈 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아서 어떻게 친해진지 모르는 친구들과만 계속 연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꽤 활발하게 활동했거든요. SNS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놀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는 스스로 고립되길 선택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한순간에 끊어버렸고, 제 이야기를 쓰던 SNS 계정은 구독용 계정으로 바뀌었어요. 여성주의 타임라인을 꾸리고 나서도 단절 상태는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흔적을 남기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민경 작가님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알게 되었어요. 타임라인에 코시사 관련 트윗이 올라오는 걸 꽤 봤었는데 그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했어요. 6월에 처음 신청해서 편지를 받아보았는데 신청한 계기도 그냥이에요. 사람들이 자꾸 좋다고 이야기하니까 나도 신청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를 읽을 때도 큰 감흥은 없었어요. 편지에서 이야기하는 여성 간의 관계가 제게는 와닿지 않았거든요. 자매애라는 단어도 낯설었고, 여자가 여자를 인간적으로든 성애적으로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어색했어요.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연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코시사를 읽고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여자들과의 관계는 어렵고, 그들에게 특별히 친밀감을 더 느끼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라고요. 여자들을 의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대하는 것 같다고도 했어요. 물론 지금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되었지만요.

 

코시사를 받아보던 중에는 편지에서 말하는 여성 간의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코시사가 만들어낸,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그 언어들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흐름도 뒤늦게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 흐름 속에서 나오는 글들을 열심히 읽었고, 글을 읽다 보니 나도 여기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그 언어로 글을 쓰고,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거든요. 사람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제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런 생각은 나도 내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조금 두려웠어요. 한 번 해보자 마음먹고 블로그까지 만들어 놓고선 막상 글을 쓰는 것도 어려웠고, (쓰지도 않았지만) 제가 쓴 글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릴 생각을 하니 무서웠어요. 못 쓴 글을 쓰고 싶지도, 못 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즈라이트에 신청하기까지도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당분간은 바쁘니까,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까 여유가 좀 생기면 신청하자 해놓고, 여유가 생기니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며 또 미루고. 그러다가 레즈라이트 신청 방식이 추첨으로 바뀌고 나서야 될 리가 없지 하면서 긴장을 조금 풀고 신청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마저도 내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덜덜 떨었고 신청을 취소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추첨에 뽑히지 못하고 나서 혼자라도 글을 써서 올려볼까 했어요. 가끔 온갖 걱정을 다 하다가도 할 수 있어, 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길 때가 있는데 자신감은 아주 잠깐 스치고 갈 뿐 항상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만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레라비언들에게 긴급 도움 요청 메일을 써놓고도 며칠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면서 보내기를 미루다가 결국 메일을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레라 레터를 받고 다시 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지만요. 저는 이때 메일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저를 매우 칭찬합니다. 레즈라이트에 고민 메일을 보낸 일이 올해 한 일 중 잘한 일로 손에 꼽을 수 있거든요. 레라비언들의 답장 덕분에 글을 써봐야겠다는 용기를 얻었고, 손을 내밀어 주신 분들의 손을 주저하지 않고 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 처음 겪어본 환대의 경험이 레즈라이트 신청을 떨지 않고 할 수 있게 해주었고, 레즈라이트에서 함께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어요.

 

레라비언들! 함께 글을 쓰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레즈라이트에서의 앞으로의 날들이 정말 기대됩니다.

반응형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재의 실감  (0) 2021.01.24
사랑하는 친구에게  (0) 2021.01.22
백설공주와 과학자  (0) 2021.01.21
진짜 편지  (0) 2021.01.15
좋아하는 옷  (0) 202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