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멀리하고 나서부터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적을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날로그 인간이 되기로 했다. 핸드폰 대신 수첩과 볼펜을 항상 내 곁에 두고 있다. 예전에 사놓고 쓰다 만 수첩을 벌써 두 개나 다 썼고, 이제는 세 번째 수첩에 내 생각들을 채워나가고 있다. 수첩에는 쓰고 싶은 글의 조각들,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그냥 순간 깨달아지는 것들,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들, 책을 읽으면서 한 생각들, 내 꿈과 소망, 그날 꾼 꿈, 내 칭찬 등 많은 것들이 적혀 있다.
낮에는 책상이든 어디든 항상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수첩과 볼펜이 있고, 잘 때도 마찬가지다. 베개의 왼쪽 자리는 이제 수첩과 볼펜의 자리가 되었다. 그 옆에는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뒤집은 다음 컵의 바닥을 뚫어 이제는 좋아하지 않게 된 가수의 응원봉을 꽂아 만든 엉성한 무드등이 하나 있다. 밤이나 새벽에 글을 쓰게 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려고 누웠는데 무슨 생각이 날 때마다 방 불을 환하게 켜고 글을 쓰면 잠이 다 달아나버릴 테니까.
자려고 누우면 어둡고 조용해서 온전히 생각에만 집중해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때 떠오르는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들을 적는다. 또 나는 대부분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에 의욕이 가장 많은 편이어서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 하고 싶은 일들 그리고 내일 해야 할 일 중에 미처 다이어리에 할 일로 적어놓지 못한 일을 적기도 한다.
밤보다 더 깜깜하고 고요한 새벽에도 수첩과 볼펜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이불을 다 차버리고 자서 춥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자다가 종종 깰 때가 있다. 보통은 이불을 다시 덮고 또는 화장실에 갔다 와서 곧 잠들곤 하는데, 안 그럴 때도 있다. 자려고 노력할수록 정신이 말똥해지고 그 와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잡아채느라 엉성한 무드등을 켜고 눈을 찌푸린 채로 글 한 편을 뚝딱 써내기도 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면 정말 잠이 완전히 깨버리기도 한다. 또 긴 꿈을 꾸고 꿈의 이야기가 다 끝나면 잠에서 깰 때가 있는데, 이때는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 마냥 비몽사몽인 채로 급하게 방금 꾼 꿈의 내용을 수첩에 옮긴다. 옮기다가 까먹을까 봐 손은 더 빨라진다.
대부분의 생각이 그렇듯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말로 뱉거나 글로 쓰지 않으면 아주 빨리 휘발된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어렴풋이 기억나거나 아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 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수첩에 쓰인 글자들은 글씨체도,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가끔은 내가 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고, 두 글씨가 겹쳐서 대체 어떤 글씨가 숨어있나 유심히 관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게 수첩에 생각을 옮길 때만 얻을 수 있는 묘미라고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어진다. 인공지능으로 채워지는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앞으로도 수첩은 내 생각들로 가득 채워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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