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스 오브 막시

[381] 2021. 5. 2. 21:44
728x90

고민의 해답, 그리고 나의 초심

 

 

하이틴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서 영화를 보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보고 나서는 정말 좋았다. 여성주의를 만난 후 사소한 일로도 여자들에게 감동을 잘 받게 되었는데 그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벅찼다. 눈물도 조금 흘렸다. 그럴 만한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또 내가 여성주의 소모임을 만들었던 과정이 비비안이 막시를 만든 과정과 비슷해서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남자를 못 버린 페미니즘이었던 점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여성이, 여성들이 뭔가 이루어내고 성취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좋았다. 번아웃이 온 여성주의자들에게 어쩌면 임파워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는 이렇다 할 번아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정말 정말 힘들어지면 이 영화를 다시 찾아 보고 싶다.

 

영화를 보고 나서 '초심'이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여성주의자들의 시작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시작에는 분명 '애초에 왜 다들 받아들였지?'(영화 속 비비언의 대사)하는 물음이 있었을 것이다. 비비언의 모습에서 내가 여성주의를 처음 접하고 여성주의자를 찾아 헤매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나의 초심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을 읽고 여성주의와 탈코르셋을 모르는 친구와 탈코르셋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친구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할지 말지에 대해서 한참 고민했다.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다! 개입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코강요는 말도 안 되고,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친구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오래 고민하다가 이 영화를 보고 내 나름의 답을 찾았다. 여성주의와 탈코르셋을 모르는 친구에게는 개입하고, 탈코르셋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친구는 기다리기로. 그 이유는 비비언의 친구인 클로디아의 대사로 대신한다. "나도 관심 있어, 내 방식대로 하게 해줘."

 

같은 여성주의자인 친구들에게 나도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게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나보다. 친구들에게 실망하곤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사람마다 속도와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마음으로 이해하고 나니까 이제는 그 친구들을 보아도 실망감이나 기대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좋았던 장면은 너무 많다. 여자만 등장하는 장면 모두 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장면은 비비언이 손에 그려진 별과 하트를 보고 축구부 주장이 비비언에게 "멋있다"고 하는 장면이다. 이때 비비언은 손에 별과 하트를 그린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지우려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닦고 있었는데 축구부 주장의 한 마디로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한 마디가 사람을 바꾸게 할 수도 있고,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껴서 그 장면이 좋았다.

 

비비언이라는 주인공 캐릭터도 정말 좋았다. 영웅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주위에 정말 있을 법한 사람이었던 게 오히려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비비언이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여전히 두려워 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과 그 변화가 주변의 여자들 덕분인 것도 좋았다. 누가 보면 비비언을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비비언이 이기적이어서 좋았다.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어디에서나 이기적인 여성 캐릭터는 '민폐여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다. 남성캐릭터의 경우에는 그 남자 주인공의 개성 정도로 여겨지는 '이기적임'이 여성에게는 '민페'소리를 듣게 만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기적인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비비언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좋았다. 저녁식사를 망치는 게 좋았고, 친구 클로디아에게 왜 막시와 함께하지 않냐고 한것도 좋았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대단히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주의를 모르는 친구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상상조차 못 한다. 그리고 결국 그 이기적임이 추진력이 되어서 스스로 변화할 수 있었고, 여자들을 모아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응형